이슬람 문화와 역사, 이슬람 전쟁, 종교 전쟁, 이슬람과 중앙아시아

압바스조의 번역 운동과 문예부흥의 배경과 요인

럼앱 2022. 7. 28. 06:31

압바스조의 번역 운동과 문예부흥의 배경과 요인

압바스조의 번역 운동과 문예부흥의 배경과 요인
압바스조의 번역 운동과 문예부흥의 배경과 요인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압바스조에서 절정에 달했던 번역 운동과 문예 부흥이 일어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과 요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치자들의 적극적인 정책 지원과 학문에 대한 열정

압바스조에서 번역 운동과 학술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첫 번째 원인으로 통치자들의 적극적인 정책 지원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당시 번역 사업은 압바스 제국의 사회 전반적인 특징이었고, 신분이 높은 제후들로부터 상인, 은행가, 무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회/정치적 지배 계층들로부터 열렬한 후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뛰어난 번역자 또는 학자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면서 출세의 길이 보장되기도 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번역자는 탈고한 원고와 같은 무게의 금을 후원자로부터 지급받을 정도로 큰돈을 벌 수 있었고요, 또, 지적 능력이 우수한 자는 정부에서 출신과 상관없이 고위직에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아울러 압바스조의 칼리파들은 학문에 대해서 매우 열정이 높았습니다. 초창기 압바스조의 번역 운동을 주도했던 2대 칼리파 알 만수르는 직접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게 수학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고요, 특히 번역 운동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7대 칼리파 알 마으 문은 우리가 아까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직접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열의를 보였습니다. 압바스조는 신흥 이슬람 제국으로서 건국 초기부터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비잔티움 제국보다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계속 강조해왔고 그 일환으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고대 그리스 학문을 계승한 문화 선진국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같은 점에서 압바스조의 번역 운동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서 자신의 우위를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선전 도구의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압바스조의 지배층들은 비잔틴 제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고대 그리스 학문에 등을 돌렸지만 이슬람 세계는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고대 그리스와 모든 인류 학문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11세기 이집트 카이로 출신의 의사였던 이븐 라드완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알 마으 문은 가장 뛰어난 자들을 총애하여 (의학의 가르침을) 소생시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의학, 논리학, 철학을 포함하여 고대의 모든 학문이 잊혔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그 학문이 특별히 발전했던 곳 즉 로마, 아테네, 비잔티움 지역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그것이 잊혀진 것처럼" 이처럼 당시 아랍 무슬림들은 이슬람 세계가 과거 로마, 아테네, 비잔티움 제국을 제치고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알 마으문의 업적을 찬양했던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문화적 환경과 다양한 출신의 인재 발탁

압바스조에서 학술 운동과 번역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다문화적 환경과 다양한 출신의 인재 발탁을 들 수 있습니다.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압바스조의 수도 바그다드에는 아랍인뿐만 아니라 러시아인, 유대인, 기독교도, 무슬림 등 다양한 종교와 언어를 가진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에 압바스조의 수도 바그다드는 다문화 사회였던 것이죠. 압바스조는 다양한 이민족들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인재 발탁에서도 종교나 출신지를 가리지 않는 그런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특히 알 마으 문이 설립한 지혜의 전당에서 최고의 번역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사람들 가운데는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참고로 네스토 리우 스파는 기독교의 한 일파인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그 당시 네스토 리우 스파가 이단으로 몰린 논쟁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느냐, 그다음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뭐라고 부르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정식 교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면서 인간이죠.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두 가지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네스토리우스 파도 거기에 대해서는 인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네스토 리우 스파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네스토 리우 스파의 교리에 따르면 바로 마리아가 낳은 인물은 신이 아니라 인간 예수라는 것이죠. 그래서 마리아는 인간 예수를 낳고 그다음에 인성을 가진 예수에게 신성이 임해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 두 가지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다 갖고 있지만 원래 마리아가 낳은 사람은 바로 인간 예수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네스토 리우 스파는 바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어머니 즉, 인간인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네스토 리우 스파는 이단 기독교 종파로 몰리게 되었고요, 그 결과 5세기 무렵 로마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서방 기독교에서 추방당한 네스토 리우 스파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서방 기독교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 바로 페르시아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은 5세기 무렵 페르시아로 망명을 했고요, 또 페르시아에서 교회를 세우고 그 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제법 교세를 넓혔습니다. 그리고 7세기 무렵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정복되고 이슬람화 되어 갔는데 그 과정 속에서도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은 계속 바그다드에 남게 되었고요, 나중에 바로 바그다드에서 바로 번역 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부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은 인도, 몽골, 중국 등으로도 건너갔고요. 특히, 그 당시 중국에 있었던 당나라에서는 제법 큰 교세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중국에서는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를 한자로 경교(景敎)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압바스조는 유럽에서는 이단으로 몰려 추방된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을 이슬람 제국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은 과거 시리아 지역에 살았던 기독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시리아어 그다음에 또 비잔틴 제국의 언어였었던 그리스어에 능통했고요, 또 시리아어 같은 경우는 아랍어와 마찬가지로 셈족 어군에 속했기 때문에 쉽게 배울 수 있었겠죠. 그래서 그들은 시리아어 그다음에 그리스어 그다음에 아랍어 이 세 언어에 능통했고요, 바로 이러한 이들의 언어적인 능력 덕분에 압바스조에서 번역가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이 압바스조에서 번역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당시 바그다드에 세워진 최고 학술 기관인 지혜의 전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전당을 보면 이슬람 제국인 압바스조의 최고 학술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초대 원장을 맡았던 이븐 마사와이흐, 그리고 2대 원장을 맡았던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 그리고 3대 원장이었던 이스하크 이븐 후나인, 이들 모두가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이었습니다. 네스토 리우 스파 기독교도들은 주로 시리아어로 쓰인 그리스 작품을 아랍어로 번역했는데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이슬람 세계는 그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철학, 과학, 의학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제지술의 전파

압바스조가 학술과 번역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제지술의 전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751년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탈라스 전투 이후 압바스조는 중국인 포로를 통해서 종이 제지 기술을 습득하게 됩니다.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제지술은 압바스조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종이는 파피루스나 양피지가 갖고 있었던 문제점들로부터 자유로웠고 또 구입과 운반이 쉬었기 때문에 압바스 전역에서 저술된 서적들이 빠르게 생산되고 전파될 수 있는 그러한 수단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당시 제지술은 현대의 PC에 버금가는 매우 중요한 혁명적인 기술 전파의 수단이었고요, 그 덕분에 압바스조에서는 저술, 연구, 번역이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압바스조에서의 철학, 과학, 의학의 발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